3. 은이 성지와 정윤기 비오
경기도 용인 ‘은이성지’(龍仁市 處仁區 陽智面 隱里路 182)가 있는 ‘은이’는
이름 그대로 ‘숨겨진 동네’, 또는 ‘숨어 있는 동네’라는 뜻으로
천주교 박해시기에 숨어 살던 천주교 신자들에 의해 형성된 교우촌이다.
천주교 발상지인 천진암과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자연스럽게 복음이 전파되었고, 박해를 피한 교우들이 숨어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은이성지 홈페이지>
사기를 구워 생계를 이어가던 이 산골마을이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안드레아를 배출한 성지가 된다.
<은이성지-자비의 문>
충청도의 기름진 땅 내포(內浦) 한 복판 "솔뫼"(소나무 우거진 작은 동산)에서
1821년 8월 21일 태어난 성 김대건 안드레아는
여덟 살 때 할아버지 김택현이 천주교 박해를 피해
가족을 이끌고 용인 골배마실로 이주함으로서
이곳에서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현재 양지성당이 있는 마을은 당시 첩첩산중으로,
뱀이 많이 나와서 뱀마을, 즉 ‘배마실’이라고 불러왔다.
그리고 김대건 가족이 거주하던 집은 배마실로 이어지는 골짜기 안에 있어
‘골배마실’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당시, 우리나라에 처음 입국한 서양 신부인 모방(Pierre-Philibert Maubant 1803~1839년)은
앞서 들어와 있던 중국인 신부 유방제(劉方濟)와 상의하여
김대건(金大建) 최양업(崔良業) 최방제(崔方濟) 세 소년을 선발,
마카오에 있는 마카오 신학교(澳門神學校)에 유학 보냈다.
1836년 4월 골배마실 이웃의 ‘은이 공소’에서 나 백다록(羅白多錄 : 모방의 한국 성인
羅, 본명 베드로의 한자 표기 백다록)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은 김대건 소년은
그해 12월 2일 출발,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
1844년 12월 최양업과 함께 부제서품을 받은 뒤
1845년 1월 1일 귀국, 석 달간 머무르다가 다시 상해로 가서
1845년 8월 17일 상해 연안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은이성지 김대건 기념관의 성인상 - 성인 유해를 근거로 가톨릭의대에서 복원함>
1845년 11월 강경 부근 황산포(나바위)에 상륙한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Ferreol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1808~1853)의 명에 따라
은이를 중심으로 용인, 이천, 안성 지역을 두루 다니며 사목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1846년 4월 13일 김대건 신부는 은이 공소에서 교우들과 미사를 봉헌한 후
새로운 성직자의 입국로를 탐사하러 인천 앞 바다에 갔다가
6월 5일 순위도(巡威島)에서 포졸에게 체포되었다.
9월 15일 서울 포도청에서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다음날인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했다.
김대건 신부의 시신은 은이 관할 내 먹뱅이(먹방이=먹을 만드는 동네. 墨里)에 살던
이민식(빈첸시오)과 몇몇 교우들이 몰래 빼내어 10월 26일 안성 미리내에 안장하였다.
김대건 성인이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 사제 서품을 받은 곳은
상해의 김가항(金家港)성당이다.
중국 성씨인 ‘김(金)씨 가문(家)이 모여 살던 동네(巷)'여서 김가항(金家港)이라 불렸다.
우리나라로서는 기념되고 보존되어야 할 장소이다.
<은이성지 - 김가항성당>
그런데 1990년대 말, 새로운 도시계획으로 이 성당이 헐린다는 얘기가 나왔다.
당시 상해 한국인 성당의 사목회장이던 우리 친구 정윤기 비오는
이 사실을 서울대교구에 알리고,
외교 채널을 통해 성당의 철거를 막아달라고 청원했다.
그러나 결국 2001년 이 성당은 헐려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한편, 잊혀 왔던 은이성지는 1992년 6월 시작된
서울교구 주평국 신부의 ‘도보성지 순례’를 계기로 알려지고,
1996년 5월 은이 공소 터 530여 평을 매입하면서 개발에 착수돼,
6월에 야외 제대와 김대건 성인 상이 건립되었다.
주변 대지들을 계속 사들여 성당과 김대건 기념관등을 완공하여
2016년 9월 24일 준공 봉헌식이 치러졌다.
<은이성지 - 김대건 기념관>
성당 건물은 김가항성당의 모습으로 재현되었고
기둥과 들보, 동자기둥 중 일부는
김가항성당 철거 당시 수습한 부재(部材)가 쓰였다.
문재 있는 다른 옥우들도 이 난에 참여하면 더 폭이 넓어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