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도모지와 시구문의 남한산성 성지
<야외 성전>
‘그 사람과는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다.’ 라고 말할 때,
‘도무지 말이 안 통해’ 라고도 표현한다.
이 때의 ‘도무지’는 ‘아무리 해도’의 뜻으로
‘도시 都是’ ‘도통 都統’과 비슷한 말이다.
이 ‘도무지’의 어원은 ‘도모지 塗貌紙’로 알려져 있다.
물 묻힌 한지를 얼굴에 몇 겹으로 착착 발라놓으면
종이의 물기가 마름에 따라 서서히 숨을 못 쉬게 막아
죽음에 이르는 형벌이 도모지이다.
1860년 경신박해 때 체포된 오치문이란 사람이 울산 장대로 압송된 뒤
도모지 형으로 죽었다고 전해진다.
천주교 기록에는 “신자의 얼굴을 한지로 덮은 채 물을 뿌림으로써
숨이 막혀 죽게 하는 백지사(白紙死, 일명 도모지) 형벌을 받았다.”고 되어 있다.
병인박해가 일어난 1866년 12월 8일에는 남한산성의 광주(廣州) 유수(留守)가
도배형(塗褙刑) 또는 도모지라고 부르던 백지사 형을 집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어원 500가지. 예담(위즈덤하우스)>
너무 많은 신자들이 잡혀오자 피를 보는 일에 진저리를 낸 포졸이나 군사들이
쉽게 처형할 수 있는 방법으로 백지사 형을 선택한 것이다.
<성당 : 제대에는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과 최경환 프란시스코 성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병자호란으로 우리의 기억에 자리 잡고,
서울에서 가까운 등산 및 드라이브 코스로 사랑 받는 남한산성은,
천주교 박해가 있을 때마다 신자들이 끌려와
3백여 명이 ‘도무지’를 비롯한 형으로 순교하여 성지가 되었다.
조선시대 경기도 광주(廣州)의 행정 책임자는 목사(牧使 정3품)였다가
1577년(선조 10) 정 2품 부윤(府尹) 으로 승격하였는데
1626년(인조 4) 치소와 마을이 남한산성 안으로 이전되었고
1795년(정조 19) 다시 유수(留守)가 다스리는 고을로 승격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 관직명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따라서 부근 여러 곳에서 신자들이 잡혀와
이곳에 갇히고 처형된 것이다.
<포도청 터 표지석>
성남시 쪽에서 남문을 통해 산성에 들어서면 나타나는
마을 복판 로터리 주차장 한 구석이 옛 포도청 터이다.
체포되어 온 신자들이 포도청에서 1차 심문을 받은 뒤,
배교하지 않는 교우들은 옥에 갇혔다.
행적이 밝혀진 36명의 순교자 중 19명이 여기서 옥사했다고 전해진다.
<연무관>
연무관은 군사들의 훈련과 무술 시합을 열던 곳으로
유사시에는 남한산성을 근거로 하여 수도 남부를 방위하던
수어청 중군의 본영으로도 사용되었다.
대박해로 천주교인들이 체포되어 끌려오면
수어영의 전영장을 겸하던 판관에 의해 이곳에서 심문을 당했다.
<시구문>
남한산성에는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비밀통로인 암문(暗門)이 16개 설치돼 있다.
동문(좌익문)에 인접한 제 11 암문은 시구문으로 불리는데 가장 규모가 크다.
순교자들의 시신이 이 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와 옆 계곡에 버려졌다.
<현양문과 순교자 현양비>
순교자 가운데 행적이 밝혀진 분은 최초의 순교자인 복자 한덕운 토마스를 비롯하여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의 일가인 김덕심 아우구스티노, 김윤심 베드로,
김성희 암브로시오, 김차희, 김경희, 김윤희와
이천 단내 출신 정 은 바오로, 정 베드로 등 36명에 이른다.
<시구문 바로 옆에 있는 수문과 동문>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굴욕의 역사 현장이며
순교자의 피로 얼룩진 패배의 장소이다.
그러나 이 굴욕과 순교의 실상과 의미를 깨달을 때
패배의 오욕에서 벗어나
새로운 승리를 맞는 전환의 장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