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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춘천 죽림동 주교좌성당 성직자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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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림동 주교좌성당 >


 

곰실공소를 열정적으로 이끌던 엄주원 마르티노는 서울 명동성당과

춘천지역을 관할하던 횡성 풍수원성당으로 신부를 모시러 다녔다.

이러한 노력은 1920918일 갓 서품된 김유룡(金裕龍 필립보) 신부가

풍수원본당(주임 정규하-鄭圭夏 아우구스티노) 보좌로 임명되어

춘천지방을 맡아보게 됨으로써 결실을 맺어

곰실공소는 춘천본당이 되었다.

 

1928년에는 본당을 춘천읍 약사리(藥司里 竹林洞)로 이전하였고,

19292대 주임 이기준(李起俊 토마스) 신부가 부임하여

한옥을 사서 성당으로 개축하고, 부설 유치원도 설립했다.

 

춘천본당은 서울교구에 속해 있다가 1939년 춘천지목구가 설립되자,

1940128일 춘천교구에 편입되었다.

1955920일 춘천이 지목구에서 대목구로 승격되어

1123일 퀸란(Quinlan Thomas 具仁蘭 18961970) 신부가

주교로 서품되면서 초대 대목구장으로 부임했다.

퀸란 주교는 춘천본당 6대 주임(19381940)을 역임했으며

엄 마르티노가 마련한 성당 터의 위 언덕을 사들여

오늘날의 죽림동 주교좌성당 건물을 짓게 한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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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직자 묘역>


 

춘천 지역은 천주교가 늦게 전파되어 다른 지방처럼 피로 얼룩진 박해가 없었다.

그러나 6·25 때 공산당에 의해 성직자와 신자들을 잃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춘천 지방을 신앙의 요람지로 만드는 데 도움을 준 외국인 성직자들과

한국인 신부들이 공산군에 의해 피살, 주검이 되어 돌아온 곳이

죽림동성당 뒷마당이다.

이 성직자묘역이 2017917일 성지로 선포되었다.



    

퀸란 주교-01.gif                      퀸란 주교 묘소-01.jpg  

               <퀸란 주교>                                                           <퀸란 주교 묘소>

 


죽음의 행진을 이겨낸 퀸란 신부

 

6·25 남침이 시작된 바로 다음 주일인 72

퀸란 신부가 본당 미사를 드릴 때 인민군이 들이닥쳐

공포를 쏘고는 20여 교우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보좌신부 캐나반(Canavan, 프란치스코)과 함께 연행했다.

 

두 신부는 외국인 사제, 수녀, 개신교 목사 등 수백 명과 함께

서울, 평양을 거쳐 만포를 지나 중강진까지

250리의 산길을 걷는 죽음의 행진을 겪어야 했다.

캐나반 신부와 서울에서 끌려온 교황사절 번(Byrne, 方溢恩) 주교는

중강진 부근 하창리 수용소에서 모진 고생과 추위를 못 이겨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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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림동성당 - 02>

 

퀸란 신부는 19533월 석방되어 잠시 고국인 아일랜드에 머무르다가

교황 사절로 한국에 돌아와 195512월 춘천교구장 주교로 성성되었다.

1966년 노령으로 은퇴, 삼척 성 요셉 병원에서 환자들을 대상으로 사목하면서

말년을 보내다가 19701231일 선종.

유해는 춘천교구 성내리 성당에 안장되었다가

뒤에 죽림동성당의 성직자 묘역에 이장되었다.

 

구인란(具仁蘭-퀸란) 주교는 1896년 아일랜드의 에이레에서 출생.

성 골롬바노 외방전교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1920년 중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13년 동안 중국 전역에서 전교하였다.

1933년 성 골롬바노 외방전교회가 전라도지역의 사목을 관할하게 되자

이듬해 한국에 입국, 6년 동안 전라도 일대에서 사목하였고

1939년 춘천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했다.

 

구 주교는 춘천교구에 40여개의 본당을 창설하고,

춘천 강릉 삼척 등지에 병원을 세웠으며

1964년 춘천에 성심여대를 설립했고

1965년 원주교구를 분할 독립시키는 등 큰 업적을 남겼다.

<가톨릭사전>

<죽림동성당 홈 페이지에는 1938년 춘천 부임으로 기록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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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직자 묘소 - 02>


 

행진의 희생자 손 프란치스코 신부

 

손 프란치스코 신부(Francis Canavan)1915215일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19401221일 사제품을 받고 1949년 한국에 입국했다.

6·25 남침으로 인민군이 진입하자 퀸란 신부는

손 프란치스코 신부에게 피난을 명령하였지만,

손 신부는 떠나지 않고 남아 있다가 체포되어 죽음의 행진을 겪었다.

이 행진에서 걸을 수 없는 이들은 사살 당하거나 아사, 병사했다.

손 신부도 1950126일 폐렴으로 병사하였고,

구인란 신부와 동료 포로들에 의해 압록강변에 묻혔다.

죽림동주교좌성당 성직자묘역에 그의 가묘가 조성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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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림동성당 - 03>


 

성직자묘역에 모셔진 그밖의 순교 사제들

 

1915년 아일랜드에서 출생, 1940년 사제품을 받은 레일리(Reilly, 파트리치오) 신부는

19493월 묵호본당 제2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6.25 때 북한군에 의해 체포돼 강릉으로 끌려가던 중 학살됐다.

도로변에 묻힌 신부의 유해는 묵호 경비사령부 앞에 매장되었고

묵호본당으로 옮겨졌으며, 죽림동성당 성직자묘역에 안치되었다.

 

아일랜드 출신의 제임스 매긴(James Maginn 야고보 1911 ~ 1950) 신부는

1935년 사제 서품 후 곧바로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936년 한국에 도착, 강원도 평강에서 사목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일제에 의해 감옥에 수감되었고

풀려난 뒤에도 가택연금으로 일체의 성사 집행 및 전교 활동이 금지 당했다.

광복 후 홍천 본당 7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1947년까지 사목했다.

194910월 삼척본당(현 성내동) 초대 주임으로 부임,

6·25 로 공산군에게 점령당하자 74일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77일 삼척 자지리에서 총살당했다.

유해는 훗날 신자들에 의해 발굴돼 죽림동성당 뒤에 묻혔다.

<두산 백과>

<죽림동성당 홈페이지에는 맥긴(McGinn, 야고보)로 표기됨.>

 

소양로 성당의 콜리어(Collier, 안토니오) 신부도

본당 부근에서 피살되었다. <소양로성당 편에 상술할 예정.>

 

손 프란치스코를 비롯, 북한 지역에서 순교해 유해가 없는

백응만 이광재 김교명 신부는 가묘를 조성해 기리고 있다.




  • 박태언 2019.06.28 00:52
    한기호동문
    오랬만입니다 나는카톨릭교인은아니지만
    딸과사위가카톨릭입니다
    기호동문이올려주는귀한글재미있게보고
    있읍니다
    고맙습니다
  • 마정 2019.06.28 07:14
    졸문 읽어주심에 감사할 뿐입니다. 따님한테, 그곳의 성지에 대해서 써보내라고 하세요. LA 친구들 모두의 건승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