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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춘천 소양로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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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양로성당 전경>


 

춘천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봉의산 언덕,

고 안토니오(Anthony Collier, 1913.6.20.1950.6.27) 신부 순교의

붉은 피를 기초로 소양로성당(춘천시 모수물길22번길 26. 소양로278-1)

아름다운 모습으로 세워져 있다.

이 성당은 죽음으로 동료를 살린 고 신부의 고결한 뜻을 기려

살신성인 기념성당으로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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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덕 아래에서 올려다 본 소양로성당>

 

 

1950625일 일요일, 이른바 6·25전쟁이 일어나자

춘천지구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장교는

죽림동성당의 퀸란 몬시뇰과 보좌신부 캐나반,

그리고 소양로성당의 콜리어신부에게 춘천을 떠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세 명의 성직자는 교우들을 버리고 피할 수는 없다며

자신의 성당에서 자리를 지켰다.

<Yahoo>


고 신부는 일요일이었던 25일 평소와 다름없이 주일미사를 봉헌하고

교우들과 저녁 기도를 바친 뒤 그 곳에 머물렀다.

적군이 코앞에 닥친 26일에도 고 신부는 미사를 봉헌했고,

위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하여 우선 성체를 옮겨 놓았다.

폭격이 심해지자 고 신부는 복사와 신자들을 피신토록 권고하고

자신은 성당을 지키겠다고 말하였다.

전황이 나빠진 27일 오후 고 신부는 복사였던 김경호 가브리엘과 함께

죽림동성당으로 가던 중 우체국 근처에서 인민군의 검문을 받았다.


 

  고 안토니오 신부 - 01-01.jpg                   고 신부-03 - 01-1946~7년 경 -맨 왼쪽.jpg

              <고 안토니오 신부>                                            <1946~47년의 고 신부, 맨 왼쪽 - 야후에서>

 

 

인민군이 고 신부에게 스파이냐고 묻자

고 신부는 가톨릭 신부라고 당당하게 대답하였고, 둘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인민군 장교는 신부의 주머니를 수색하여 시계, 묵주, 돈 등을 압수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즉시 밧줄에 묶여 공지천 방향으로 끌려갔는데,

도중에 인민군은 고 신부를 먼저 쏘고 다시 두 발을 더 쏘았다.

총을 맞은 고 신부는 그 자리에서 선종하였고

김 가브리엘은 고 신부가 총을 맞으면서 그를 끌어안았기 때문에

목과 어깨에 심한 총상만 입었다.

김 가브리엘과 함께 묶여 끌려가던 콜리어 신부는

가브리엘, 자네는 처자식이 있으니 꼭 살아야 하네.

   저들이 총을 쏘기 시작하면 재빨리 쓰러지게.

   내가 쓰러지면서 자네를 덮치겠네.” 라고 말했다.

김 가브리엘은 총을 맞았지만 자신을 끌어안고 쓰러진 콜리어 신부 덕분에

목숨을 건져 훗날 그 상황을 생생히 증언했다.

고 신부의 시신은 29일 교우와 동네 사람들에 의해 총살당한 그 자리에 묻혔다.

<춘천교구 홈페이지>

    

 

[인민군의 총을 맞고 두 사람이 쓰러지자,

  인민군 중 한 명이 '더 쏠까' 말했고, 다른 한 명이

  '죽은 것 같은데, 총알 아까우니 그냥 가자'고 했단다.

  그 날은 밤새도록 비가 내렸으며, 고 신부와 김 가브리엘의 손이 함께 묶여 있어서

  새벽에 가브리엘이 정신을 차려보니 손이 퉁퉁 부어 뺄 수가 없었다.

  가브리엘은 간신히 밧줄을 풀고 인민군을 피해 산을 넘어 피신할 수 있었다.]

<김경호의 여동생 김영자 수산나(1937년 생), 김순자 세실리아 자매가

  201145일 소양로성당 사제관에서 소양로성당 김주영 시몬 신부 및

  관계자들과 행한 인터뷰 - 춘천교구 홈페이지.>

 

    고 신부 - 02 -02 1946.jpg

                                              <1946년 경의 고 안토니오 신부 - 야후에서 옮김.>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고 안토니오 신부는

아일랜드 동북부 라우스(Louth)군 클로거헤드(Clogherhead)에서 출생,

19381221일 나반(Navan)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1939년 내한하여 횡성 본당 보좌신부로 부임했다.

1940년 강릉 임당동 본당 보좌신부로 전임하였으며,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1941년 일경에 체포되어 강릉 감옥에 갇혔고

이후 춘천으로 이송되어 오랜 기간 동안 억류되는 고초를 겪었다.

 

 

고 신부는 1949년부터 소양로성당 부지 매입,

설립 준비와 신앙공동체 형성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195015

소양로본당 설립과 함께 주임 신부로 부임되었다.

 

 

195110월 교우들은 얼굴과 팔에 총상을 입고,

항상 차고 다니던 성패가 있는 신부의 유해를 수습하여

장례미사를 올리고 춘천교구 주교좌 죽림동본당 뒤뜰에 안장하였다.

콜리어 신부의 희생으로 목숨을 건진 김 가브리엘은 훗날

강원도 거진 부근의 마달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1989년경 별세했다고 한다.

<마달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던 윤재봉 토마스의 증언 등.>


    

죽림동성당 고 신부 묘소-02.jpg    아일랜드 고향에 설치된 고 신부 기념판-01.jpg

                         <죽림동성당 고 신부 묘소>                                     <아일랜드 고향에 설치된 고 신부 기념판>

 


고 안토니오 신부는 "한국 교회의 근현대 신앙의 증인

-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 시복 추진 대상으로

현재 시복 추진 중이다.

 

 

현재의 소양로성당 건물은 3대 주임인

성 콜롬반 외방선교회 제임스 버클리(James Buckley) 신부가

고 신부를 기리고자 1956년 건립했다.

국내 최초로 근대적 양식을 도입한 이 건물의 평면은

당시에는 보기 드문 반원형을 채택햐여,

중앙 제단을 중심으로 신자석을 부채꼴로 배열하고,

원주면 중앙에 현관과 고해소, 좌우 끝단에 제의실과 유아실을 덧붙였다.

일체의 장식을 배제한 단순한 형태와 밝고 기능적인 내부 공간은

중세풍의 교회 건축에서 벗어난 선진적 형태로 평가받아

2005415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61호로 지정되었다.

<소양로성당 건립 기념 동판에서>



소양로성당 성전-01.jpg

                                                                        <소양로성당 성전>



2006년부터 원형 보존 작업을 통해 말끔하게 단장하고

원형을 최대한 살려 20095월 중창(重創) 축복식을 가졌으며

양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콜리어 신부의 순교혼을 기억하고자

살신성인 기념성당으로 명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