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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생가 - 여사울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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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사울성지>

    

 

대개 이존창은 본디 신창(新昌) 성덕산 집안의 사천(私賤 . 비복(婢僕), 백정,

  무격(巫覡), 배우, 창녀 따위)입니다.

   <가톨릭사전, 천주교 성 홈페이지에는 농민의 아들로 돼 있다.>

  이미 어려서부터 홍낙교, 홍낙민 형제와 함께 제법 과거 공부를 익혔는데

  가장 먼저 사술(邪術)에 물들어, 전념하여 학습하고 힘을 다해 미혹시켜

  친한 사람은 요사하고 허탄한 말로 꼬드겨 따라서 배우기를 권하였습니다.

  따라 배운 사람들이 깨우치기 쉬운 글을 뽑아 한문과 한글로 베껴 전하니,

  점차 널리 알려져 따르는 사람이 날마다 찾아왔습니다.”

 

충청도 관찰사 박종악(朴宗岳 1735~1795)이 임금(정조)과 주고받은 편지를

그대로 옮겨 적어 놓은 필사본이 수기(隨記)인데,

모두 105편의 편지가 실려 있다.

그 가운데 17911120일부터 179213일까지

임금에게 보낸 10통의 편지에 천주교에 관한 내용이 들어있고,

내포(內浦)의 사도(使徒)’ 이존창(李存昌 1759~1801)에 대한

위와 같은 글들이 포함돼 있다.

<천주교 Good News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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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는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1785년경 서울 명례방 공동체에서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된 후 열렬한 신앙심과 학구심으로

가성직단의 일원이 되어 충청도 지방의 전교 임무를 맡았다.

<가성직(假聖職) : 천주교를 처음 시작한 선조들은

  교리의 이해가 부족해서 평신도들끼리 신부를 자청해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베풀었다.>

 

이존창의 고향 충청도 천안군 여사울(현 충남 예산군 신암면)

30여 호, 300여 명이 넘는 동네로,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이존창의 전교에 의해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으며,

교세는 예산을 포함한 내포 지방 전체로 퍼져나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790년 가성직제도가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된 뒤에

이존창은 신부 영입을 위해 윤유일, 지 황 등에게 여비를 주어

중국 북경으로 보내, 마침내 주문모 신부를 맞아들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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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존창 생가터>

    

 

1791년 신해박해 때 호서지방 괴수로 지목된 이존창은

관가에 체포되었으나, 심한 고문과 꼬임에 빠져 배교하여

석방되었고, 양심의 가책을 못 이겨 고향을 떠나

충청도 홍산(鴻山. 현 충남 부여군 홍산면)을 거쳐

전라도 고산(高山)으로 이주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이존창은 주문모 신부를 만나 얼마 동안 함께 지내기도 했다.

신부는 그에게 네 악행과, 권한도 없이 성사를 마구 집행한 죄를

어떻게 속죄할 수 있겠는가. 순교만이 너를 용서받게 할 것이라,

말하곤 했다.

그래서 그는 벅차고 고된 일에 자신을 기꺼이 내맡겼으며

끊임없이 순교를 생각하고 있었다.

<‘평신도’ 2019년 여름(계간 64)>

 

1795년 말 그는 지방 관리들에게 체포되어 천안으로 옮겨져

6년 동안 연금 생활을 하다가,

신유박해 때인 1801318(25) 다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48(226) 정약종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고

충청도의 감사가 있는 공주로 이송되어

410일 황새바위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해읍정법(該邑正法 - 고향으로 보내 처형하여

그곳 사람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판결)의 명에 따라

고향에서 처형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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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사울성지와 이존창 유적비>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는 충청지방에서의 지대한 전교 실적으로

내포의 사도라는 영예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신부의 역사를 개막한 선지자가 되었으니

한국인 두 번째 사제인 가경자최양업 신부가

그 사실을 편지로 남겼다.

 

이존창의 집안이 처음에는 모르고서 가짜 사제를 냈으나

  나중에는 진짜 사제를 내는 영광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에게서 두 명의 사제(김대건, 최양업)가 탄생된 것입니다.

   그의 딸 이 멜라니아는 김대건 신부의 조모이고,

   저의 모친 이 마리아는 그의 사촌누이의 조카딸입니다.”

 

내포 지역과 여사울 성지의 중요성을 인식한 대전교구는

2002년부터 성지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주변 용지를 매입하고 진입도로를 넓히는 한편

십자가의 길과 강당을 조성했다.

20081월 성지 본당으로 지정하고,

그해 12월 충청남도 기념물 제177호로 등록되면서부터

성역화를 본격 추진하여, 생가터 앞 강당 자리에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 순교자 기념성당을 신축하고,

기존의 공소 건물 뒤에는 사제관과 수녀원을 건립했다.

스페인풍의 기와를 얹은 순교자 기념성당은

20101016일 봉헌식을 가졌다.

<천주교 성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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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사울성지 성당>                                              <성전>                                         

 


여사울성지(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여사울길 61-2. 신종리 136-10)

여사울의 유래는, 여우 + 마을의 줄임말로

여우가 많이 출몰하는 마을이라는 설과

<내포교회사 연구소>

서울과 비슷한 마을이라는 설이 있다.

 

여사울(餘村) 또는 여술은 ‘~과 같다’,  ‘~과 비슷하다라는 의미의

  ‘()’자가 서울이란 단어 앞에 붙여져서 만들어진 합성어로,

  부유한 기와집이 즐비하여 마치 서울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여사울이 속한 충남 서북부 지방은 넓은 내포평야가 펼쳐져 있고,

  강과 바다의 물길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이고,

  곳곳에 포구(浦口)가 발달한 상업 유통의 중심지였으며,

  세곡(稅穀)을 서울로 운반하는 조운(漕運)의 길목이었으므로

  농업과 상업으로 부()를 획득한 백성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에

   ‘여사울과 같은 명칭이 생겨날 수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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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존창 생가터와 여사울성지 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