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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가정성화의 은총을 비는 단내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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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내성지 입구>

 

 

"사람 나자 한 평생의 /  므슨 귀신 그리 만/ 아침 저녁 죵일토록 / 합장배례 쥬문 외고 /

  잇난 돈 귀한 재물 / 던져 주고  바텨 주고 /자고 쟈 행신 언동 / 각긔 귀신 모셔봐도 /

  허망하다 마귀 미신 / 우매한고 사람드라 / 허위허례 마귀 미신 / 밋지 말고 텬쥬 믿셰.”

 

도각시 마무신막 / 외고 우러 복 바드냐 / 절 한다고 효자되냐

 

닐곱 날즁 엿새간/ 근면 노력 다 하고셔 / 닐곱○ 날 고요히 / 텬쥬 공경 하여보셰

인간 금슈 쵸목 만/그 아버지 텬쥬일셰 /부모 효조 알고지면 / 텬쥬 공경 알고지고

 

1799(정조 3) 손암(巽菴) 정약전(丁若銓) 권상학(權相學) 이총억(李寵億)

3인이 합작한 십계명가(十誡命歌) 구절들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가사(天主歌辭)로서,

이승훈(李承薰)의 문집 만천유고(蔓川遺稿)속에 한글로 필사, 수록되어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1779년 겨울

이 익(李 瀷)의 제자인 권철신(權哲身)이 경기도 광주(廣州) 앵자산(鶯子山)에 있는

주어사(走魚寺)와 천진암(天眞菴)에서

그 제자들과 천주교 교리에 관한 강론을 가진데서 시작되었다.

 

이 토론회를 강학회(講學會)’라고도 부르는데,

모인 사람은 이승훈 정약전 권상학 이총억 이 벽(李 檗) 등이었다.

강학회가 끝난 뒤, 천주교 교리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이 벽은 천주공경가(天主恭敬歌)를 짓고,

정약전 등은 이 십계명가를 지어 이승훈에게 준 것으로 보인다.

 

십계명가는 만천유고(만천은 이승훈의 호)에 수록돼 있는데,

1801년 이승훈이 처형당하고 5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천주교에 대한 조정의 공식적 박해가 다소 이완된 철종 무렵에

그의 아들 이신규(李身逵)가 부친의 유작(遺作) 등을 모아

이 책을 편집한 것으로 추정되며, 겉장에는 만천집(蔓川集)으로,

그 안에는 만천유고(蔓川遺稿)로 제목이 붙여져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십계명가 작가 중 한 명인 이총억(李寵億)은 조선 후기 실학파의 중요 학맥인

성호학파(星湖學派) 이기양(李基讓)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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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양 초상화>

 

이기양(1744, 영조 20 ~ 1802, 순조 2)은 한음(漢陰) 이덕형(德馨)7대 손으로,

대사간·예조참판·좌승지를 역임하였다.

1800년 진하부사(進賀副使)로 청나라에 가서 천주교 교리를 직접 접하고,

귀국하여 이가환·이 벽 등과 사귀었다.

특히 이 벽과의 토론을 통해 천주교의 합리성을 인정하고

은밀히 천주교를 신봉하였으나, 겉으로는 남인공서파(南人攻西派)와 친분을 가짐으로써

서학 반대자로 자처했다.

그러나 아들 총억(寵億)이 신자였으므로 반대파들은 그를 사학(邪學)의 교주라고 비난하였고

그 자신도 친국소에서 무답으로 응하여 단천에 유배되었다.

 

이기양은 이 익의 제자이자 초기 천주교 신자 권철신 암브로시오와 친밀한 사이였는데,

45세 때인 1788년부터 외가인 단내(丹川)에 와서 살았다.

아들 총억이 권철신의 제자가 되면서 천주교를 믿었고,

외사촌들인 정 은, 정 섭, 정 옥 과 그 가족들이 모두 교인이 됨으로서

단내는 우리나라 최초의 교우촌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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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건 신부상>

 

이곳은 또한 김대건 신부의 사목 활동지였다.

김대건 신부는 184510월 입국한 후 다음 해 4월까지,

10년 만에 만난 어머니와 함께 지내며,

은이 공소를 중심으로 용인, 양지터골, 은다라니,

이천의 동산밑과 단내, 시어골 등에서 사목했다.

 

천주교 성지개발위원회는, 1866년 병인박해 때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정 은(鄭 溵)의 시신이 안장된 이곳(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단천리 357-2)

1987년 성지로 개발하여 정 은, 정양묵 조손(祖孫), 다섯 분 성인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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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은, 정양묵 묘소>

 

     정 은 바오로와 정양묵 베드로

 

정 은 바오로(1804-1866 )는 신유박해 3년 후 단내에서 태어나

사촌형(이기양, 정 섭, 정 옥)들이 이미 유배되거나 사망한 뒤였으므로

그들에게 직접 교리를 배우지는 못하였다.

김대건 신부로부터 성사(聖事)를 받고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1866(고종 3) 시작된 병인박해 때 붙잡혀 남한산성으로 압송되었다.

재종손(再從孫)인 정양묵(亮默) 베드로는

나도 천주교 신자입니다. 대부(代父)를 따라 치명하러 왔으니 나도 죽여주시오.” 하며

스스로 광주 영문으로 들어가, 그 해 12월 얼굴에 백지를 발라 질식시켜 죽이는

백지사(白紙死)로 조손이 함께 순교하였다.

 

순교한 교우들의 시체는 남한산성 동문(東門) 밖 개울가에 버렸는데,

아버지가 치명했다는 소식을 들은 정 은의 아들 일동 방지거와 수동 필립보는

우여곡절 끝에 낭떠러지 바위 밑에 굴러 떨어져 있는 부친의 시신을 발견하고

밤에 다시 가서 들쳐 메고 단내에 와 모셨다.

시신을 못 찾은 정양묵 베드로는 후에 성지를 조성하면서

남한산성 동문 밖 흙을 거둬 정 은 바오로 산소 옆에 모셔졌다.

정 은의 모친 허 데레사와 부인 홍 마리아도 세례 교인이다.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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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이문우 요한>

 

 

성 이문우 요한(李文祐 1810 ~ 1840. 2. 1.)

 

이문우는 경기도 이천 동산밑 마을의 양반 교우 집에 태어났으나

5살 때 고아가 되어 서울에 사는 신자 집으로 입양을 가게 되었다.

이 요한은 1년 이상 모방(Maubant, ) 신부를 따라 지방으로 다니며 복사로 일 했고,

1839년 기해박해로 옥에 갇힌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모금활동을 하였으며,

선교사들이 순교한 후에는 교우들과 함께 그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지냈다.

결국 7명의 신자와 더불어 성직자들의 시신을 찾아 노고산에 모신 다음

피신하기 위하여 친구 집에서 나오다가 붙잡혀,

184021일 다른 두 동료와 함께 서울 당고개에서 참수형 당했다.

19257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고,

19845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죽기 엿새 전 그는 양부모와 교우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남겼다.

제 신앙의 벗들하고 함께 있으니 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저는 이 행복한 재회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

이 세상은 순간일 뿐이며, 육신은 허울일 뿐입니다.

이 몸을 보십시오. 열흘이 지나면 이것의 영혼은 이것을 떠납니다.

그것이 악취가 나는 것과 함께 있다면 그 얼마나 섬뜩하고 비참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의 육신에 더 신경을 쓰고 그들의 영혼은 돌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동물이나 다름없습니다.

동물은 구원 받을 영혼이 없습니다. 사람이 동물처럼 구원 받을 영혼이 없다면

그 얼마나 슬픈 일이겠습니까! ...

세 가지의 적과 싸우십시오. 악마, 세상 그리고 육신과요.

그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바로 육신입니다. ...

저희는 묵상과 기도로서 스스로를 고찰할 수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님께 중재를 청하십시오.

그분은 우리 모두에게 친절하시며 놀라운 분이십니다. ...

지금은 제 생의 마지막 순간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함께 기도하신다면, 위험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죽음을 두려워 마십시오.

저희의 주님을 낙담한 영혼들을 구원하시는 분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모든 고통과 시련을 겪어내신 후에,

영원한 행복과 기쁨의 천국으로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

이것은 내 생의 마지막 순간에 쓰는 편지입니다.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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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이호영 베드로>

 

최초의 순교 성인성 이호영 베드로 (李鎬永 1803 ~ 1838)

 

성 이호영 베드로는 경기도 이천에서 가난한 시골 양반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친을 여윈 후 모친과 누이 이소사 아가타(Agatha)와 함께

한강 북쪽 문막이라는 곳에서 살았다.

 

18341,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가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입국했다.

1801년 최초의 외국인 사제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순교한 이래

33년만의 첫 사제이다.

당시 조선의 천주교인들은 대단히 기뻐했으며 그들의 행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들은 처음으로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받았다.

유방제 신부는 이호영을 교리 교사와 신도회장으로 임명했다.

 

18352월 그는 누이와 함께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4년간 옥중생활에서 갖은 고문과 병고를 잘 참아냈고,

모범적인 태도로 옥졸들에게 존경을 받아 여럿이 교리를 배웠다.

이호영과 그의 누나 이소사는 다른 옥방에 수감되어 있었음에도,

옥졸들은 때때로 그들을 서로 만나게 해 주었는데,

그 때마다 그들은 서로를 격려했고 같은 날에 순교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이호영은 병마를 못 이겨 18381125일 누나보다 먼저 목숨을 잃었다.

 

19257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5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됨으로서, 한국 최초의 순교 성인이 되었다.

<두산백과>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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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내성지 성모상>

    

 

성녀 이소사 아가타(李召史 1784 ~ 1839)

 

이호영의 누님 이소사 아가타는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났고,

17세에 출가하여 3년을 살다가 남편과 사별했다.

현석문 카롤루스는 기해일기에서 아가타의 생활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얼마 아니 되는 가산마저 없이 한 후

   늙은 시어머니와 어린 시동생과 함께 근근이 살았다.

   비록 곤궁 중에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언제나 화평한 기색과

   기쁜 웃음이 떠나지 아니 하였으니.

   그녀의 착하고 아름다운 언행을 모두 기록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18352월 체포되어 모진 매를 맞고 주리를 틀리었으나,

조금도 겁내는 빛을 보이지 않았고, 용기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한번은 옷을 벗겨 높이 매달아 능욕하기도 했으나,

그녀의 입에서는 오직 배주(背主)하지 못하겠습니다.”라는 한마디의 대답뿐이었다.

 

1839524, 여덟 명의 다른 신자들과 함께 포청을 떠나 형장으로 향한 아가타는

우마차 위에서도 다른 때와 같이 온화한 기색으로 눈을 내리뜨고 있었고,

십자성호를 긋고 조용히 칼을 받았다.

192575일 시복되었고, 198456일 시성되었다.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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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내성지 성 부자상>

    

 

성 남이관 세바스티아노(南履灌 1780 ~ 1839)

 

양반으로 천주교에 입교한 남필용(南必容)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8세 때 천주교 신자인 조증이(趙曾伊)와 혼인하여 신앙생활을 하던 중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부친이 체포되자

경기도 이천의 처가로 피신했으나 붙잡혀

부친은 강진(康津)으로, 자신은 경상도 단성(丹城)으로 유배되었다.

 

부친은 유배지에서 사망하고,

남이관은 1832년 대사면으로 30년 만에 유배가 해제되자 상경하여

처가의 외척 되는 정하상(丁夏祥)을 도와 성직자 영입 운동에 참여하였고,

의주 변문(邊門)에서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를 맞아들인 뒤

그로부터 영세와 견진성사를 받고 회장으로 임명되어 교회 활동에 열심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이천으로 피신하였으나

917일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형조를 거쳐 의금부로 이송되었다.

의금부에서 정하상, 유진길(劉進吉) 등과 함께 문초와 형벌을 번갈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았다.

사형 판결을 받고, 마지막으로 아내에게 함께 순교하자는 말을 남긴 후

서소문 밖 형장에서 김제준(金濟俊), 조신철(趙信喆) 8명의 교우들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192575일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시성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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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내 성가정 성지>

 

성녀 조증이 바르바라(趙曾伊 1781 ~ 1839. 12. 29.)

 

조증이는 경기도 이천에서 천주교를 믿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16세에 남이관과 결혼했다.

 

1801년 신유년 박해 동안에, 친정 아버지와 시부모가 순교했고,

남편은 경상도 단성에 유배되었다.

조증이는 이천의 친정으로 내려가 남동생과 살았다.

30세 때에 한양으로 올라가, 매우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살며

신앙생활에 매진했다.

 

친척인 정하상 바오로가 외국인 선교사들을 베이징에서 조선으로 데려오는데 필요한

자금 마련을 도왔다.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가 입국한 후, 1832년 남편 남이관이 유배에서 풀려났고,

그녀는 남편과 함께 유 신부를 보필하며 공소회장을 마련하는 등

교회와 교우들을 위해 봉사했다.

유방제 신부가 청나라로 돌아간 후, 조증이는 그녀가 살고 있는 집에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를 기거토록 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조증이는 남편을 친정으로 피신시키고

어린 딸과 함께 집에 있다가 18397월에 체포됐다.

그녀는 신앙을 버리고 남편이 숨어 있는 곳을 불으라는 포장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주뢰형(전도주뢰형-剪刀周牢刑 : 가새주리. 두 다리를 동여매고

정강이 사이에 두 개의 붉은 몽둥이를 꿰어 그 한 끝을 좌우로 벌려가며

잡아 젖히는 형벌)을 받았고, 장형 180 대를 맞았다.

남편 남이관 또한 체포되자 부부는 자신들의 신앙을 위해 죽고자 하는

강한 용기와 열망을 보여주었다.

 

18391229일 서소문 밖에서 여섯 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되었다.

192575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고, 198456일 성인품에 올랐다.

<위키백과>

    

성가정-01.jpg

                                                         <성가정상>

 

 

성가정 성지

 

단내성지에서 기념하는 순교자들은 이문우 성인을 제외하면

모두 가족 순교자들이다.

정 은 바오로와 정양묵 베드로 순교자는 할아버지와 종손자 사이,

김대건 신부도 부자가 함께 순교성인이며,

이호영 성인과 이 아가다 성녀는 남매간,

조증이 성녀와 남이관 성인은 부부 사이이다.

이문우 성인은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남달리 극진했던 성인이다.

 

이 가족 순교자들은 가족이 함께 성덕의 정상에 도달함으로써,

가정 성화의 귀감을 보여준 분들이다.

이들은 마지막 순교의 길을 가면서도 가족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하고자 함으로써,

지극한 부부 사랑과 부모 사랑과 자식 사랑을 보여준 분들이다.

그래서 단내성지는 순교성인들의 모범을 본받아 가정 성화를 위해 기도하고,

성가정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얻기 위해 순례하는 성가정 성지가 되었다.

<단내성지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