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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권철신 일신 형제의 숨결이 깃든 양근성지

    

양근성지-0101.jpg

 

미사 중 독서자가 오늘의 말씀을 읽을 때

성경을 펴서 그 구절을 눈으로 보면 안 된다고 배웠다.

독서자의 음성에 집중하여,

그 소리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매번 그렇게 노력을 해 보았지만

하느님의 음성으로 들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거의...

 

7년 전, 미국에서 같은 성당에 다니는

집 사람의 대모님 부부와 친구 부부가 함께 한국에 오신 일이 있었다.

번잡한 식당에서 점심을 모시기보다는

공기 좋은 곳으로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양근 성당으로 안내했다.

 

미사가 시작되자, 깜짝 놀라 당황하는 일이 벌어졌다.

주임신부가 심각한 언어장애가 있어서

하시는 말씀 대부분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었다.

전례 내용이야 다 아는 것이니 못 들어도 큰 문제는 없었으나

자꾸만 분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진행되어, 강론이 시작되었다.

양근 성지의 유래, 순교자들의 행적, 그분들의 굳센 믿음....

그런데, 이 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신부님의 발성이 확 트여서

정확한 발음으로 유수(流水)와 같이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 이야말로 하느님이 말씀하시는구나!”

비로소 하느님의 음성을 들은 것 같았다.

 

- 19 ---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마태 10-1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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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철신, 일신 형제>

 

양근성지의 중심에는 권철신 암브로시오(權哲身 1736~1801)

권일신 프란치스코 사베리오(權日身 ? ~1792 ; 가톨릭 대사전) 형제가 있다.

 

권 형제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대학자이며 관리였던 권 근(權 近)의 후손으로

고조는 대군사부(大君師傅) 권 적(權 蹟), 증조는 승지 권 흠(權 歆),

조부는 진사 권 돈(權 敦)이며, 아버지는 권 암(權 巖)이다.

증조부 권 흠이 갑술옥사로 관직을 잃고 낙향하여 양근 땅에서 살았다.

 

실세한 남인 가문에 태어난 권철신은 일찍이 과거를 포기,

부친에게서 학문을 익혔고, 24세 때 성호 이 익(李 瀷)의 문하에 들어가,

기호 남인계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점차 성호학파의 거유(巨儒)가 되었다.

 

1777(정조 1) 경기도 양주(楊州)에서 정약전(丁若銓) 정약용(丁若鏞) 이 벽(李 蘗)

남인 실학자들과 서학교리연구회를 열면서 본격적으로 서학을 탐구했으며

토론과 강학은 경기도 여주 주어사(走魚寺)에서 이루어졌다.

 

서학은 결국 천주신앙으로 전개되었고

이 벽에 의해 서학은 서교(西敎), 천주학은 천주교로,

, 학문적 지식이 종교적 신앙으로 변환되었으며

권철신도 이 벽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학행(學行)으로 많은 동향인들을 천주교에 입교하게 하였고

여러 차례 천주교인으로 피소되었지만, 정조의 비호로 화를 면했다.

정조가 죽고 노론 벽파가 집권하자 체포되어,

정약종(丁若鍾) 홍낙민(洪樂敏) 이승훈(李承薰) 홍교만(洪敎萬) 최필공(崔必恭)

최관천(崔冠泉) 등과 함께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형 집행에 앞서 옥중에서 장독으로 사망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두산백과>

 

권일신(權日身 1742년 영조 18 ~ 1791년 정조 15 프란시스 자비에르 Fran-cis Xavier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양근성지 홈페이지에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쓴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의 제자이자 사위이다.

 

천진암, 주어사 강학에서 이 벽의 영향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청나라에서 세례를 받고 온 이승훈이 1782년에 최초로 영세를 주었다.

그 뒤 이 벽 이승훈과 함께 포교에 전력해 충청도 내포의 이존창(李存倉)

입교시키고, 전주의 유항검(柳恒儉)을 개종시켜,

천주교의 호서, 호남 지방 전파에 크게 기여했다.

 

1785년에는 서울 명례동(현 명동)에 있는 역관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정식으로 교회 집회를 열었고,

추조적발사건(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났을 때는 사대부의 자제라고 훈방되었으나,

다시 형조로 가, 압수당한 성상(聖像) 등의 반환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했다.

 

1791년 윤지충(尹持忠)이 모친 제사를 거부한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천주교 탄압이 벌어지면서 홍낙안(洪樂安) 목만중(睦萬中)의 고발로

교주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제주도 유배형을 받았으나 노모의 회유로 옥중에서 회오문(悔悟文)을 써서

예산(禮山)으로 유배지가 바뀌었으나

유배지로 가던 중 취조 과정에서 얻은 장독(杖毒)으로 주막에서 죽었다.

 

달레(Ch. Dallet)는 회오문에 대하여한국천주교회사,

부모에 대한 지나친 인성적(人性的) 사랑 때문에 배교했다고 기록했다.

<두산백과>

  

감호암-02.jpg

                                                         <감호암 - 성지 홈페이지 자료사진>

 

정약용은 권철신 묘지명에서, <‘공의 자호는 녹암(鹿庵),

재호(齋號)는 감호(鑑湖)이다.’ 이 벽이 서교를 선교할 때

따르는 사람이 많아지자 감호는 사류(士類)가 우러러 보는 사람이니,

감호가 교에 들어오면 들어오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다.’하고,

감호를 방문하여 10여일 묵은 일이 있었는데,

그 때 공의 동생 일신이 이 벽을 열심히 따랐다.’> 고 적었다.

 

감호란 강물이 잔잔하고 맑아 거울 같은 호수라는 말이다.

한강에는 서호(西湖 현 서강대 앞 강), 동호(東湖 현 동호대교 부근 옥수동 앞 강),

감호(현 양근의 갈산리, 오빈리 앞 강) 등이 있었다.

양근성지 권일수 신부는 배를 타고 수상 순례를 하다가

반쯤 물에 잠긴 큰 암석에 감호암(岩湖鑑)이란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양근성지 앞 떠드렁 산()에서 2km 정도 하류였다.

이로서 권철신 집안의 터전이 성지 부근임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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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호암 위에, 또는 부근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감호정. 성당 앞에 재현해 놓았다.

    신앙의 선조들이 이 정자에서 공부하고 토론했다고 기록이 전해진다.>

 

 

1794년 한국 최초의 외국인 신부를 입국시킨 윤유일 바오로 복자도

경기도 여주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이웃인 양근 한감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해 살았다.

 

그의 가족들도 모두 열렬한 신자가 되어,

아버지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임자도로 유배되었고,

삼촌 윤관수 안드레아( ?~1801)는 양근에서 고문을 당하다가 순교,

동생 윤유오 야고보(尹有五)와 사촌동생인 윤점혜 아가타(尹占惠 1778~1801)

양근에서 참수되었다. 윤점혜는 한국 교회 최초의 동정녀 회장이다.

윤점혜의 동생 윤운혜 루치아, 그의 남편 정광수 바르나바와

시누이 정순매 바르바라는 서울에서 참수당했다.

 

1800년 양근에서 7명의 신자가 체포되었는데

그 중 끝까지 배교를 거부한 윤유오와 유한숙(兪汗淑 ?1801)

1801425(313) 양근에서 함께 순교했다. <가톨릭 대사전>

이들이 참수된 곳은 현 양평 군청 서쪽 200~300m지점(양근 4),

양근천이 한강과 만나는 지점에 있는 오밋다리(서울로 가는 다리)

부근으로 추정된다.

이재몽(1747~1801)·이괘몽 형제와 두 딸, 김원성, 이 아가타 등도

양근에서 처형되었다. <양근성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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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현된 오밋다리>

 

조동섬 유스티노(趙東暹 17381830)는 양근 출신의 덕망 높은 한학자로

1800년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으나

18012월 다시 붙들리자 배교하여 30년 형으로 함경도 무산에 유배되었다.

유배지로 간 조동섬은 자신의 배교를 뉘우쳐, 더욱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고,

훗날 정하상(丁夏祥)이 찾아왔을 때 신앙과 한학을 가르치며,

교회 재건과 신부 영입에 힘써 줄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183092세까지 장수, 유배지에서 죽었다.

 

그의 아들 조상덕 토마스(趙尙德 ?~1801)는 아버지에게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한발 한발 따라가는 것 밖에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라 말하고, 잡혀가 모진 고문 끝에 감옥에서 옥사했다.

 

이밖에 알려진 순교자들은 다음과 같다.

복자 권상문 세바스티아노(17691802)

권상문은 권일신의 아들, 권철신의 조카로서 훗날 큰아버지의 양자가 되었다.

윤유일 형제를 비롯한 교우들과 기도 모임을 갖거나 교리를 연구하였다.

18006월 양근에서 일어난 박해로 체포되어 양근과 경기 감영을 오가며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꿋꿋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1801년 한양으로 압송되었다가 1802130(음력 18011227)

양근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조숙 베드로 권데레사 동정 부부-01.jpg

                                             <조 베드로와 권 데레사 동정 순교 부부>

 

복자 권천례 데레사(17841819)

권 데레사는 권일신의 딸이요, 권상문의 동생이다.

동정을 지키며 살아가려 하였으나 친척들의 설득으로 포기하고

21세 때 조 숙 베드로와 혼인 했다. 당시 베드로는 냉담자였다.

혼인 날 밤 권 데레사는 남편에게 동정 부부로 살자고 부탁하자

베드로는 아내의 원의를 들어주었고, 신앙심이 되살아나서 딴 사람이 되었다.

데레사 부부는 남매처럼 동정으로 지냈다.

성 정하상을 도와 일하다 18173월 말경 체포되어

2년 이상 옥에 갇혀 있다가 181983(6. 13.) 참수로 순교했다.

순교 한 달이 지나서야 시신을 수습, 머리뼈를 바구니에 담아

성 남이관 세바스티아노(南履灌 1780~1839)의 집에 두었는데,

바구니를 열면 향기가 진동하였다고 여러 교우들이 증언했다. <양근성지 홈페이지>

 

복자 조 숙 베드로(趙 淑 17871819)

조 베드로는 양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이후 신앙생활을 점차 등한시하게 되었으나,

18세 때 권천례를 아내로 맞아 동정 부부의 삶을 약속하며

참 신앙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15년을 살며 동정을 어기려는 유혹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아내의 권유로 다시 마음을 돌리곤 하였다.

조 숙 베드로 부부는 한양에 살며 정하상을 돕다가 체포되어

함께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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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교의 큰 칼 아래>

 

복자 조용삼 베드로 ( ?1801)

양근에서 태어난 조용삼 베드로는 일찍 모친을 여의고 부친 슬하에서 자라났다.

집이 가난한데다가 몸과 마음이 모두 약하였고, 외모 또한 보잘 것 없었으므로

서른 살이 되도록 혼인할 여성을 구할 수조차 없었다.

부친과 함께 여주로 이주하여 천주교에 대해 들었고,

정약종을 스승으로 받들어 교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예비 신자 때인 1800415일 정종호의 집에서

이중배 마르티노, 원경도 요한 등과 함께 부활절 대축일 행사를 갖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부친을 끌어내다가 배교하지 않으면 부친을 당장 죽여 버리겠다며

혹독한 매질을 하자 굴복, 배교하여 석방되었다.

관청에서 나오다가 이중배를 만났고, 그가 권면하는 말을 듣고는

즉시 마음을 돌이켜 다시 관청으로 들어가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는 경기도 감영으로 끌려가 다시 여러 차례 문초를 받았으나,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영세를 받는 등 믿음을 더욱 굳게 했다.

1801327(음력 214) 형벌을 못 이겨 옥사,

이 지역에서 탄생한 신유박해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다.

 

 

복자 홍익만 안토니오 (洪翼萬 ?1802)

홍 안토니오는 양반의 서자로 태어나 양근에서 살다가

1790년을 전후하여 한양의 송현으로 이주했다.

1801년의 순교자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사촌 서() 동생이요,

홍필주 필립보와 이현 안토니오의 장인이다.

1785년 김범우 토마스를 찾아가 교회 서적을 빌려 읽었으며,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1796년 홍필주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를 만나 교리를 배웠고,

신자들의 공동체를 만들고 교회 활동을 도왔으며,

때때로 주 신부를 자신의 집에 모셨다.

당시 그의 집은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하부 조직이요 집회소였던

‘6의 하나로 선정되어 있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생활을 떳떳하게 고백했다.

1802129(음력 18011226)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양근이라는 지명은 양제근기(楊堤根基)’라는 말에서 비롯했다.

방죽에 버드나무를 심어 농지 유실을 막고 튼튼한 근원으로 삼았다는 뜻으로,

고구려 시대 때부터 써왔다.

19089월 양근군과, 막걸리로 이름난 지평군을 합쳐 양평군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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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의 길>

  

차가 밀려 조금 늦게 대성전에 들어서니 미사가 막 시작된 참이었다.

정말 하느님의 음성으로 들었던가?”“내가 오버한 거 아니었나?”

7년 전의 감격스러웠던 미사를 되새기며 자리에 앉았을 때,

! 절반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의 전례와 복음 말씀.

그때 그 신부님이 아직 계시구나.

강론도 저렇게 하면 어떡하나, 걱정과 기대가 뒤섞였다.

 

오늘 아침에 제가 사랑하고 아끼던 신부님이

  갑자기 선종했다는 비보를 들었습니다.’

부드럽게 강론의 머리를 여시더니, 우렁찬 목소리로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

열강하시는 게 아닌가!

시 한 번 신비를 맛보고, ‘신비를 묵상하게 하는 양근성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