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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최초의 수덕자(修德者) 홍유한 유택지

홍유한 유택-01.jpg

                                               <홍유한 유택-01>

 

우리나라 천주교회는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서울 수표교 부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벽·권일신·정약전·정약용·

최창현 등을 입교시키고, 그들이 중심이 되어 명례방(明禮坊)의 김범우의 집에서

정기적 신앙 집회를 가지기 시작함으로써 정식으로 탄생했다.

 

그러나 천주교의 씨앗은 그 이전에 여러 선조가 뿌렸는데

그중 두드러진 선각자 한 분이 농은 홍유한(隴隱 洪儒漢 1726∼1785) 이다.

 

홍유한은 풍산 홍씨(豊山) 명문가의 16대손으로 서울 아현동에서

홍창보(洪昌輔)의 아들로 태어났다.

충청도 예산에 살던 그의 집안은 조부 때 서울로 이사했다.

 

여덟 살 즈음 사서삼경과 백가제서(百家諸書)에 통달한 신동으로 전해진다.

1742년 16세 때부터 실학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의 문하에서

순암 안정복, 녹암 권일신, 복암 이기양 등과 함께 수학했다.

1751년 이익이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克)’ 등 서학을 연구할 때,

홍유한은 유교와 불교에서 알지 못했던 진리를 여기에서 발견,

천주교 교리를 온몸으로 받아들였고, 특히 칠극에 몰입했다.

 

 

칠극(七克)이란?

 칠극 표지 -01 - 한국학 중앙연구원.jpg   칠극 1권-02-국립중앙도서관.jpg  칠극 1권-03 한글 필사본 -배론성지 소장.jpg         <칠극-표지-한국학 중앙연구원>  <칠극 1권-국립중앙도서관>  <칠극1권 한글판-배론성지>

 

칠극은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 신부 판토하(Pantoja, 1571∼1618)가,

죄악의 근원이 되는 일곱 뿌리와 이를 극복하는 일곱 덕행을 다룬 수덕서(修德書)

칠극대전(七克大全)의 약칭이다.

1614년에 중국 북경에서 7권으로 간행된 이래 여러 번 판을 거듭했다.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馬竇)의 ‘천주실의’와 함께

일찍부터 우리나라에 전해졌고, 한글로도 번역되어 두루 읽혔으며

남인 학자들을 천주교에 귀의케 하는 데 이바지한 중요한 책 중 하나이다.

권철신과 정약전, 이벽, 김원성, 권상학, 이총억 등이 참석한

1779년<정약용의 기록> 천진암 주어사 강학에서도 연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익은 ‘성호사설(星湖僿說 - 사설은 자질구레한 이야기)’에서 이 책에 대해,

이는 곧 유학의 극기설(克己說)과 한가지라고 전제한 다음,

죄악의 뿌리가 되는 탐욕, 오만, 음탕, 나태, 질투, 분노, 색과 더불어

이를 극복할 덕행으로 은혜, 겸손, 절제, 정절, 근면, 관용, 인내를 설명하면서,

천주교와 유교가 윤리 면에서 어느 정도 일치할 뿐 아니라,

때로는 천주교가 우월함을 은연중 시인했다.

<홍유한 유택지 홈페이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고향인 예산 여사울로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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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은 홍유한 초상화>

 

홍유한은 칠극을 생활화하고, 서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하기 위해서

1757년 고향인 예산 여사울로 내려가 18년을 살았다.

예산은 1763년 이익의 사망 후에 성호학파의 본거지가 되어있었다.

성호의 조카 정산(貞山) 이병휴(李秉休 1710~1776)가 그 중심에 있었다.

권철신, 이기양, 그리고 이벽 등 차세대 성호학파를 대표하는 신진기예들이

예산을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이들의 주자학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양명학의 수용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다시 서학으로 경사(傾斜)되었다.

특히 이벽은 1774년 예산에 내려가 6, 7개월간 이병휴를 스승으로 모셨다.

이곳에서 태어난 내포의 사도 이존창(李存昌 1759~1801)도

홍유한의 훈도를 받고 자랐다. <가톨릭평화신문>

여사울은 신유박해(1801)에서 병인박해(1866)에 이르기까지 순교자가 이어진

초기 천주교 신앙의 못자리이다.

김대건, 최양업 두 사제의 출신지도 인근 마을이다.

 

 

소백산 아래 구구리에서 만년을 보내

홍유한 유택-02.jpg       홍유한 유택 -03.jpg

                        <홍유한 유택>                              <홍유한 유택-경종 4년(1724) 조부 홍중명이

                                                                      하사받은 효자문을 구구리 집에 옮겨 달았다.>

 

홍유한은 ‘칠극’에서 터득한 진리를 오롯이 실천하는 삶을 살기 위해

1775년 소백산 밑 구들미(현 영주시 단산면 구구로 239-6. 구구리 322-5)로 이주했다.

권철신, 복암 이기양(伏菴 李基讓 1744∼1802), 조카인 홍낙민 형제 등과 함께

학술 공동체를 이루려 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홍유한만 먼저 간 것이다.

그의 이주는 스승 성호가 오래전부터 꿈꾸었던 영남행을 실천한 것이기도 하다.

이익은 생전에“지금 세상에 인륜이 있는 고장을 구하려 한다면

영남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라고 말한 바 있다.

 

홍유한은 주일마다 속세 일을 전폐, 기도와 묵상으로 하루를 거룩히 지냈다.

그는 자비심과 정의감이 투철하면서도 희비애락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는 위엄이 있었다.

기질이나 신체가 강건한 편이었으나, 지나친 고행과 절식으로 점차 쇠약해졌고

오로지 기도와 묵상으로 만년을 보내다가 1785년 1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농은 홍유한의 누님의 사위였던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 1736~1801)은

농은의 제문에서 그의 일생을 이렇게 소개했다.

“아! 공께서 식사하실 때는 반드시 그 절반을 더셨고, 어쩌다 맛난 음식과 만나면

 더더욱 그 즐김을 절제하셨습니다.

 덜어내고 줄이기를 지극히 하여 피부에 윤기가 나지 않았으니.....

 젊어서부터 내실에서 지내는 경우가 지극히 드물었고,

 서른 살 이후로는 다시는 자식을 낳아 기르지 않았고....

 몸에 고질이 있어 기거가 몹시 힘들었는데도 잠자리에 들 때가 아니고는

 기대거나 눕지 않으셨다.

 뜻하지 않게 나쁜 일이 생겨도 조용히 즐겁게 받아들여,

 남을 비난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자신이 바르다고 변명하지도 않았고...

 신분 낮은 사람이 마루 아래에서 절을 올리면 반드시 몸을 움직여 답례하셨다.

 평소에 말을 쉽게 하지 않아 일찍이 몸으로 맹세하지 않았으며,

 길을 가다 늙고 병든 이와 만나면 말에서 내려 그에게 주고는,

 백 리 불볕더위 길을 아픈 몸을 무릅쓰고 걸어가셨다.”

 

이 글은 절식(節食), 절색(節色), 율기(律己), 함인(含忍), 집겸(執謙), 시인(施人)을

몸소 실천했음을 밝힘으로써, ‘칠극’의 죄종(罪宗)을 극복한 삶을 증언한 것이다.

홍유한 유택-04.jpg      홍유한 유적지 기념비.jpg

                                           <유택 >                                        <홍유한 유적지 기념비>

 

또, 이기양은 이런 제문을 올렸다.

“아! (1)식욕과 (2)색욕은 사람이 크게 욕망하는 바이나, 선생은 자신에게 있어

 담박하기가 고목과 같았고, 막아 억제함은 원수와 적을 대하듯 했다.

 (3)해침과 (4)요구함은 사람이 누구나 병통으로 여기는 바이나, 선생은 남에 대해

 혹 다치기라도 할까 봐 아껴 보호하였고, 능히 하지 못하는 듯이 베풀어 주었다.

 치우치기 쉬운 것이 (5)오만인데, 선생은 스스로를 볼 때

 언제나 남과 어울리기에 부족한 듯이 한 사람이다.

 가라앉히기 어려운 것이 (6)분노이지만, 선생은 남을 살핌에 있어,

 항상 어디를 가든 덕이 아님이 없는 것처럼 한 분이다.

 잠시 동안은 능해도 오래가는 이가 드문 것은 (7)게으름이 틈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선생은 세상에 사는 60년 동안 한결같아서 줄을 그은 것처럼 반듯하였다.”

 

이 일곱 가지 또한 「칠극」의 7 죄종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권철신과 이기양은 홍유한의 삶이 ‘칠극’을 바탕으로

욕망과 죄악을 몰아내는 수덕(修德)의 삶 그 자체였고, 그가 사실은

천주교의 참 신앙을 실천했던 신앙인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홍유한이 뿌린 씨앗들

봉화 우곡성지의 홍유한 동상.jpg

      <묘소가 있는 봉화 우곡 성지의 농은 동상>

 

농은이 타계한 1785년 즈음, 조선에서는 천주교 신앙이 태동(胎動)하고 있었다.

그 기반의 조성에는 홍유한의 가르침과 솔선수범이 크게 자리 잡았으며,

그의 집안에서도 많은 신자가 배출되었다.

육촌 형제인 홍양한(洪亮漢)의 아들이 신유박해 때 순교한

복자 홍낙민 루카(洪樂敏 1751~1801)이고 홍 루카의 아들이

기해박해 때 순교한 복자 홍재영 프로타시오(洪梓榮 1780~1840)이다.

기해박해의 순교자 성 홍병주 베드로(洪秉周 1798~1840)와

성 홍영주 바오로(洪永周 1801~1840) 형제는 홍낙민의 손자들이다.(홍빈영의 아들들)

홍재영의 아들 홍봉주 토마스(洪鳳周 1814~1866)도 병인박해 때 순교했다.

홍재영은 정약현(丁若鉉 1751~1821)의 사위이니, 홍 토마스는 정약현의 외손자이다.

 

홍유한은 천주의 존재를 굳게 믿고 계명을 지키며 덕행을 닦다가 일생을 마쳤다.

김대건 신부는 조선 교회 창립에 대해 쓴 서신에서

“홍유한이라는 선비는 세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천주교 신자의 예에 따라

  천주님을 공경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천주교회에 대한 기초 지식이 없었고

  교회의 법규도 몰랐던 것입니다. 단지 매달 일곱째 날을 지킬 정도였습니다”라고

그의 초보적 신앙생활에 관해 이야기했다.

<홍유한 유택지 홈페이지.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구구리(九邱里) 지명의 유래

 

홍유한이 말년을 보낸 ‘구구리’는, 마을 뒷산에 무학봉(舞鶴峯)이 있는데

“학이 구고(九皐)에서 우니 소리가 하늘에 들린다.”라는 시전(詩傳)의 옛말을 따라

‘구고’라 불리던 것이,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구구리’로 명칭이 바뀌었다.

<성인 성지 목록>

 

‘시전’은 시경(詩經)의 내용을 알기 쉽게 풀이한 책이다.

‘구고’란 깊숙한 늪이라는 뜻이다.

시경 학명(鶴鳴)에 ‘鶴鳴于九皐 聲聞于天’(학명우구고 성문우천),

‘학이 깊은 늪에서 우니, 그 소리가 하늘까지 들린다.’라는 글이 있는데

이는 “어진 사람은 깊은 곳에 은거하더라도 그 덕행이 다 알려지게 된다.”는 의미이니,

농은 선생의 이주는 미리 정해진 필연이었던가...

 

[‘집옥재’가 문을 닫은 뒤에도 성지순례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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