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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울산 지역 최초의 울주 언양(彦陽)성당

울주 언양성당-01.jpg

<언양성당 – 앞의 돌은 ‘뱃머리 제대’. 성전 앞쪽은 상공에서 보면

   뱃머리 모양이며, 마치 모든 것을 싣고 하늘로 날아갈 듯한 느낌이다.>

 

언양성당(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송대리 422. 언양읍 구교동1길 11)은

울산 지역에서 가장 먼저 건립되었고, 부산교구 두 번째 본당으로서,

순교 선열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순교자 후손들의 본거지이다.

전국적 성소의 온상으로 대주교와 주교 등 70여 명의 성직자와 수도자,

20여 명의 동정녀를 배출했으며, 교구 내 가장 많은 16개 공소를 둔 본당이다.

대주교는 서정길 요한(徐正吉 1911~1987)으로 대구교구 제7대 교구장이었고,

최재선 사도 요한 주교(崔再善 1912~2008)는 초대 부산교구장을 지냈는데

두 분은 사제 수품 동기이다.

한 성당에서 대주교와 주교를 배출한 본당은 전국에서 언양성당뿐이다.

<언양읍 소개 – 언양 지역의 천주교>

 

 

언양성당은 1888년 조선대목구 시절에 이미 본당 설립 위원회가 결성되었으나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본당 설립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부산교구 첫 본당은 절영도(絶影島. 1912년부터 영도 影島로 불림.)에 세워졌다.

 

가톨릭 부산 본당은 1889년 경상도 교구(대구)에서 독립,

1890년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 조조 신부(Moyse Jozeau 우리 이름 조득하 趙得夏)가

첫 사제로 부임<가톨릭 사전 등. 청학성당 홈페이지에는 죠조, 조덕하 趙德夏로 표기>했다.

조 신부는 절영도의 현재 청학성당 수녀원 자리에 본당을 차렸으나

1891년 대청동 2가 15번지(징검다리 부근)로 이전했다.

1900년에는 초량3동으로 옮겨 부산진성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16년 범일동 현 데레사여고 자리로 옮겼고, 1965년 새 건물을 지어 범일동성당이 되었다.

보드뱅 신부.jpg            2018년 세워진 보드뱅 정도평 신부 동상.jpg

             <보드뱅 신부>                                   <보드뱅 신부 흉상>

 

1927년 5월 25일 부산교구 두 번째로 언양 본당이 설립되어

보드뱅 신부(Émile Auguste BEAUDEVIN 1897~1976 우리 이름 정도평 丁道平)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보드뱅 신부는 프랑스 하돌(ha-dol)에서 출생, 1922년 파리외방선교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1926년 내한, 1927년 5월부터 1939년 3월까지 언양본당에서,

이후 1973년 프랑스로 귀국할 때까지 영남지역 일원에서 사목에 전념했다.

<가톨릭신문. Google.>

 

정도평 보드뱅 신부가 부임하면서 새 성당 건물을 짓는 일이 본격화됐다.

신도들이 단돈 10전이라도 보태, 언양 송대공소 주변 부지를 마련, 공사에 들어갔으나

건축비가 모자라 성당 짓는 일은 여러 해 걸렸다.

파리외방선교회의 지원을 받았고, 신도들이 직접 벽돌 짐을 져 나르며

1932년 8월, 어렵사리 고딕식 건물을 완공시켰다.

사제관은 1936년 10월에 이르러서야 마무리되었다.

<근대문화 역사유산>

 

보드뱅 신부가 직접 설계하고, 명동성당을 지었던 중국인 기술자들이 동원된 성당은

부산교구의 유일한 고딕식 석조 2층 건물이자 울산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건축물이다.

언양성당 성지-성전.JPG

                                 <언양성당 성전>

 

◆ 순교자들

 

언양 지역의 첫 신앙 공동체는 이 지역 출신 오한우(吳漢佑 1760~1801 베드로)가

1790년에 영세한 뒤 1801년 신유박해 때 충청도 지역에서 관헌에게 체포되어

백지사(白紙死)로 치명하였고,

오한우와 함께 영세한 그의 육촌 매제 김교희(金喬喜 1775~1834 프란치스코)가

박해를 피해 1800년대 초, 내간월 불당골(佛堂谷 현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로 숨어들어

교우촌을 이루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언양성당 홈페이지>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자료에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또, 백지사가 병인박해 때부터 시행된 점으로 보아, 그 근거가 희박한 편이다.

<가톨릭 성지목록>

 

문헌 자료에 의하면 언양 지방에 처음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이 지역에 유배 온 강이문으로부터 전교 받았다고 전해지는

오치문(1804~1861 오한우의 손자)에 의해서인 듯하다.

이후 박해 시대인 1850년경부터는 언양 주변이 번창한 신자 촌이 되었다.

 

언양 지역의 교우촌들은 병인박해 때 심한 타격을 입었다.

문헌에 나타나는 이 지역 최초의 순교자는 김사집(金士執 필립보 1845~1867)으로,

1866년 11월 진영 포졸에게 체포되어 이듬해 5월(음)에 순교했다.

 

이어 언양 대재(竹嶺) 교우촌에 살던 허인백(許仁伯 1822~1868 야고보),

김종륜(金宗倫 1819~1868 루카), 이양등(李陽登 ?~1868, 베드로) 등 3명이

1868년 9월 14일(양)에 체포되어 울산 장대에서 순교했다.

<언양성당 성지 홈페이지.>

<세 분 복자의 약전(略傳)은 이 연재 ‘82. 경주 관아와 옥 터 성지’ 편에 서술.>

 

이밖에도 성처인(成處仁 1801), 신인표(申仁杓 1834), 김상은(金商垠 ?)

성진탁(成震鐸 1839) 성철규(成喆奎 ?) 감아가다(1860), 김영제(金永濟 베드로 1876),

차장득(車長得 프란치스코 1868) 이월주(李月柱 야고보 1868), 옥소사(玉召史 발바라 1868)와

복자 윤봉문(尹鳳文 요셉 1888)이 순교했고,

그 외 순교자로 구씨 오씨 김씨 등이 있었다 하나 문헌 및 근거를 찾지 못하고 있다.

<언양읍 소개 – 언양 지역의 천주교>

 

 

◆ 유물전시관

유물전시관.JPG          유물전시실.jpg

                     <유물 전시관>                                               <유물 전시실>

 

언양 지방 천주교 선교 200주년을 기념하여 1990년 12월 4일

옛 사제관 자리에 유물전시관이 개관되었다.

신앙 유물과 민속 유물 등 총 696점이 전시되어 있는데,

신앙 유물은 교황청에 등록된 귀중한 자료다.

초기 교회 교우들이 사용하던 각종 기도서 교리서 등 고서와

미사와 전례에 사용했던 제의, 제구들도 보이고,

2층에는 선조들이 생활필수품으로 사용하던 민속품들을 모아 놓았다.

 

 

◆ 오상선(吳象善 1840~1867) 묘소

오상선 묘소.jpg

                                                     <오상선 묘소>

 

성당 마당에서 대형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 뒷산으로 올라가면

병인박해 순교자 오상선의 묘소가 나온다.

오상선은 이 지방에서 처음으로 신앙을 받아들인 오한우의 증손자이다.

오한우는 서울을 왕래하며 오몽상, 권일신, 정약용과 교분을 두텁게 하고

<천주실의>와 교리 서적 몇 권을 얻어서 집으로 돌아와

열심히 신앙공부를 하여 천주교에 입교했다.

오상선의 아버지 오치문도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나 정확한 자료가 없다.

오상선은 병인박해 때 언양 감옥에 갇혀있다가 백지사형으로 순교했다.

 

 

◆ 성모 동굴

14처와 성모동굴 가는 길.JPG         성모동굴.jpg

            <14처와 성모 동굴 입구>                                           <성모 동굴>

 

대형 돌에 새겨진 십자가의 길 14처를 따라 화장산(花藏山) 정상 부근에 오르면

언양읍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성모 동굴이 있다.

애초, 보드뱅 신부가 성모 동굴 만들 계획을 세웠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2000년 대희년을 맞아 전 교우들이 참가, 동굴을 완공했다.

언양성당-02.jpg

[‘집옥재’가 문을 닫은 뒤에도 성지순례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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